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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나쁜소년이서있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TV에서 나오는 홈쇼핑 프로그램들은 퍽 요란하다.
지상 최대의 물건들이라고 믿게 되는 쇼호스트들의 찰진 입담들.
나는 늘어진 배를 쪼물딱 거리며 몹시 게으른 자세로 쇼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라는 대단히 상투적인 단어처럼, 헬스용 자전거를 주문했다.
헬스용 자전거에 올라 눈을 감고 힘껏 달렸다. 근육 하나 없이 늘어진 이 몸뚱아리가 매끈해질 수 있을까.
이 살덩이들, 이 것은 내게 무슨 은유일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 허연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23p



내 뱃살의 은유가 치열한 생활들의 흔적이라면 무척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단지 게으름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므로 상스럽다. 이렇게 상스럽다, 라고 말하면 정말 상스러운 것이겠으나,
허연 시인은 상스럽다, 라는 단어 마저 상스러운 것이 아닌 쓸쓸한 감정으로 치환해버린다.

내 책장의 수백권의 시집 중 내가 읽고 전율을 느끼거나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던 시가 있었을까. 나는 사실 제대로 시를 읽어내질 못한다. 그러다가 작년 말, 허연의 새시집을 사서, 두고두고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시집은,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하면서, 교묘하게 젖게 만든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에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같은 책, 17p


살아가는 것을 말했을 뿐인데 주절주절 혼자 지껄였는데, 한편의 시가 되버린 상황.
시를 쓰는 삶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시인 상황.
내 어깨는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돌리면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자꾸 난다.

by djccuri | 2009/03/26 23:49 | 詩를 읽다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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