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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1. 이 영화 수상하다.

이 영화의 서사는 의문투성이이다. 아이를 잃은 여자의 심리를 카메라는 애써 외면한다. 이 외면의 출발이 의문의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공권력에 저항하며 승리하는 일련의 과정들도 어쩐지 치밀하지 못하다. 선과 악은 너무도 쉽게 드러나있으며 관객은 누가 승리할지 뻔히 알게 된다.(어쩌면 영화 포스터나 광고를 통해 이미 알고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모성애를 운운하기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다. 다만 우리가 모성애를 쉽게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엄마-잃어버린 아이'의 신화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잘 짜여진 직물처럼 규칙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감독은 감동의 실화 등으로 치부되어 버릴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이미 부여된 상태에서 카메라를 잡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감독에게 관심 있는 것은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왜 이런 이야기가 발생했느냐의 문제이다.



2. 콜린스의 직업

영화의 주인공인 콜린스(안젤리나 졸리 역)의 직업은 전화교환원들의 관리자이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전화 연결에 오류가 생겼을때 문제를 해결하는 일(영화에서 주로 보여지는 그녀의 직무)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계속 전화에 오류가 생긴다.

전화는 본질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끼리 기계적 장치에 의해 연결되는 것이다. 처음 통화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왜곡될 확률이 적찮이 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떤 상황에 처해진 채로 통화하는지도 잘 모르며, 어조만 간단히 변화시켜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왜곡 된다.

그리고 이 시대가 그닥 전화 기술이 발달되있지 못했는지, 전화는 기계적으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연결되지 않는다.
곧 소통되지 않는다. 소통은 곧 단절이고, 이 단절된 소통을 해결해 줄 어떤 장치나 사람이 필요하다.

콜린스는 사람들 간의 단절된 소통을 연결해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3. 콜린스는 독백한다.

콜린스는 아이를 잃었다. 상황은 발생했으며 이제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한다. 당연히 연락하게 된건 경찰.
이 영화의 대표적인 대립구도 이긴 하지만 경찰이란 존재는 콜린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콜린스가 경찰에게 하는 대사는 사실 독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자간의 문제해결 과정에서 충돌이 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경찰이 콜린스의 말을 전혀 듣고있지 않는 다는 점이다.

콜린스를 돕는 조력자로 브리글렙 신부가 등장한다. LA경찰이 다분히 적대적인 이 시민운동가는 적극적으로 콜린스를 도와준다. 그러나 브리글렙 신부 또한 콜린스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은 아니다. 그의 관심은 콜린스의 말이 아니라 시민운동가로써의 그의 자세이다. 그는 LA경찰에 대항하고자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콜린스의 말때문에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콜린스가 그녀의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들을 떠올려보라. 역시 그녀는 브리글렙 신부 앞에서도 끝없이 독백하고 있다.

정신병원은 콜린스의 독백 상황을 보여주는 (은유라고 말하기엔 너무 노골적인) 장치이다. 완벽하게 소통되지 않는 구조의 절망. 그리고 유일하게 콜린스의 말을 듣는, 창녀가 한 명 등장했을 뿐이다.


4. 살인마 스토리

이 영화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이를 죽이는 정신병자급의 살인마가 등장한다. 영화를 차지하는 부분으로 볼때 사실 이 살인마의 장면이 오히려 브리글렙 신부보다 비중이 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이 살인마의 이름은 물론 배우 이름까지 모르겠다. 단지 사건을 부각 시키기 위해 등장했다고 보여지기에는 너무 큰 당신, 미친 살인마.

일단 그냥 살인마라고 하자. 우리는 사실 이 살인마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콜린스도 모르고 브리글렙 신부도 모르고 LA경찰도 모른다. 심지어 법정에서의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시민들도 모두들. 그는 누구인가.

그런데도 감독은 이 살인마를 자주 화면에 보여준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는 사형대 장면까지도 너무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콜린스에게, 경찰에게, 누군가에게 계속 끊임없이 뭔가 말하고자 한다. 법정에서 뭔가 말할 듯 말듯 하다가, 콜린스와 면회장면에서도 말할 듯 말 듯 하다가, 사형대에서도 우리 우매한 관객들은 계속 그가 뭔가 말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인지,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참히 아이들을 죽여왔던건지. 그는 왜 그런 처절한 생을 살아야만 한건지. 왜 그 시골 구석에 처박혀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5. 다시 소통에 대하여

그렇다. 이 영화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소통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 영화는 계속 작동되고 있다. 소통되지 못하는 상황, 소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 결국 미궁으로 빠져버린 이야기. 그리고 소통되지 않는 이 상황에 대해 소통되게 하기 위한 한 여자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스가 소통장애가 생긴 전화 문제를 해결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우리들의 문제는 '아이가 실종되서' 가 아니라 사실 '서로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용산 화재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경찰과 시민이 서로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촛불을 든 시민의 과격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진심을, 우리들의 마음을 듣지 않는 정부가, 혹은 정부의 마음을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아서, 어쩌면 우리도 듣고 있지 않아서는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콜린스 처럼 누군가에게 독백을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노쇠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달관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들, 싸우지 말고, 독백하지 말고, 일단 들어보게나, 당신들의 진심을, 당신들의 마음을, 그리고 상대방의 말도 정성껏 들어보게나. 현대 사회가 뿌려놓은 고장난 전화기들 때문에 싸우지들 말고, 일단,

우리 마음의 전화기를 고치시게나

by djccuri | 2009/02/14 00:13 | 영화를 보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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