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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에겐 푸른 지느러미가 없다

이젠 詩나 文學 같은 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좀 더듬어 거려봤는데 당최 기억나지 않다가도 가끔,
장만호, 같은 시인은 기억나는 거다. 예전에야 귀신같이 외웠다마는, 몇년도 무슨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같은건 기억도 안나고,
그저 장만호, "수유리에서" 라는 절창이 기억났을 뿐이다.
신경림 선생의 수업을 듣고 다니던 시절이였는데 본심 심사위원이 신경림 선생님이였다. 술자리에선지 강의시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 또한 절창임에 동감하기에 특별히 기억나던 이름이다. 장만호.

몇주전인가 퇴근길에 영풍에 들렀다가 몇년만에 시집 코너에 들렀는데, 이 이름을 발견했다 장만호.
오래된 소설책을 우연히 폈다가 발견한 만원짜리 지폐처럼 반가웠다 장만호.

졸린눈으로 공무원 준비 하는 어린 학생들과 얼굴만 봐도 사시준비생임을 알것 같은 포스의 아저씨인지 동생인지 모를 사람들 사이에서 장만호를 읽었다. 백수 아저씨의 도서관 첫날은 그렇게 장만호를 읽다가,

그러니까 첫장부터 흥분해서
푹 젖어버려서, 못 믿겠으면 만져봐도 좋다라고 우겨도 될만큼 읽다가

기술적으로야 다른 작품이 더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시에서 오랜만에,
울컥 했다. 울컥, 울컥.


청어(靑魚)

장만호

그대가 사랑을 잃었다 한다, 후두둑
바람이 들창을 넘는가 모퉁이 술집
빗방을 밀려와 어깨를 치는데
그대 웃음이 흠집 많은 탁자 같다, 이슬 맺힌
술잔을 매만지거나 청어의 살을 바르며,
그대를 가려줄 우산이 나에겐 없다
처음, 그대가 청어를 제일 좋아한다 했다
깊은 바다의 푸른 지느러미…
그러나 푸르던 추억 지나간 자리, 드러나니
이 남루한 등뼈
창 아래 바랜 벽지 젖어
오랜 이름들 잉크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본다
흔적이 상처가 되는 것을 본다
흐린 불빛들이 몸을 뒤척이는 이 저녁,
이운 하늘 아래로는 물의 그물들,
그대와 나에겐 푸른 지느러미가 없다
한세상 유영할 추억의 힘이 없다
그러나 그대 우리가 산다는 것이 이렇듯 가시 많아
제 몸 찔러오는 것이라도
때로 상처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억만 장 깊은 물속 아픔을 헤치며
맨살의 힘, 남루한 등뼈나마
한 길 가야만 하리라

저기,
물 밀어 가는 청어 두 마리

장만호,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 2008년




아마 마흔 남짓된 연인이든 부부든 친구든 아무튼 청어 구이에 오래된 주점에 앉아 주저리주저리 청춘의 회한을 읖조리다 보면 먼 옛날 추억의 청어는 우산의 부재로 변주되고 다시 오랜 이름으로 번져가는 잉크가 상처로 상처가 가시로 푸른 살은 어디론가 가고 가시만 남아 청어인지 가시고기인지 뭔지 모를 그러나 청어인 두 마리인지 부부인지 친구인지 모를.
(이 말도 안되는 문장이 울컥하여 느낀 감정이라 생각해주기 바람)

집에 오니 아내가 거실에서 노트북을 꺼내놓고 가계부를 쓴다. 마지막 월급이 입금되었고 은행에 갔다온 모양이다. 시를 쓰고 문학을 얘기할때 만났던 아내 앞에서 흉한 가시를 드러내 놓고 회한에 잠겨 멍하니 서 있었다. 와이프는 걱정말고 책도 읽고 글이나 좀 써보라 하지만,

나의 푸른 지느러미는 다 어디로 갔나, 문장은 사라진지 오래고 글씨 조차 써지지 않는 투박한 손,
이라고 생각한건 다 장만호의 이 시 때문이다.
곧바로 개그 하는 개구장이 아내를 보면서,
아 마누라님아, 우린 아직 펄떡거리는 푸른 꽁치 두마리여~ 라고 함께 푸드덕 거렸다. 개구장이 내 마누라다.

장만호의 시에는 번뜩이는 비유가 소름끼치는 부분이 많다. 오랜만에 잊고 살았던 '수유리에서'를 읽으니 상쾌해진다.


수유리에서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 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 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잔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장만호, 위의 책



어흑,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까지 이르면 머리가 쭈뼛거린다.


by djccuri | 2009/01/23 23:16 | 詩를 읽다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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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上雨下云 at 2009/01/24 00:13
잘 봤습니다. 별 생각없이 클릭했지만 좋은 시인을 추천받았네요.
싸이다이어리에 끄적대는 글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지요 ㅠ
Commented by djccuri at 2009/01/24 00:38
잘 보셨다니 다행이군요^^ 실은 저도 아직 다 읽지는 못하고 반정도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시집을 펴봤는데 마침 괜찮은 시집이 걸렸군요. 싸이는 안해봐서 제가 잘....
Commented by 上雨下云 at 2009/01/24 05:26
아뇨 제말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싸이에 끄적거리는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였습니다.

Commented by djccuri at 2009/01/27 17:46
아..네...제가 오해를...그런 이야기였군요...^^
Commented by junhalee at 2009/02/11 15:15
아... '수유리에서'... 참 멋지네요...
마지막으로 시집을 펼친 게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도 가물거립니다. 휴가처럼 시간을 내서 시집을 손에 잡기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시집을 볼 수 있는 그런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데, 서울에 사는 직장인으로서 정말 어렵네요. 덕분에 간만에 마음 좀 축이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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