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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한 손

이 글을 쓰지 않으면 포스팅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질 것 같아서 쓴다.

2009년이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를, 한 3년 정도 산 것 같은 기분.
요약하면 나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1월에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회사에서 짤렸다.
뭘 잘 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내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속한 팀 자체를 드러냈다. 혹은 도려냈다.
퇴직금에 위로금에 기타 등등에 나는 일단 당분간 좀 놀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씁쓸하지는 않았다.
올 1월에는 소주를 참 많이 마셨다. 나는 슬프거나 분하지 않은데 사람들이 대신 울어줬다.
나는 껄껄 거렸다. 출근 안해서 건강해지고 즐겁다고, 아무리 술 많이 마셔도 내일 따위는 걱정없다고,
그랬다. 술을 참 많이 마신 1월에는, 그렇다, 회사의 인트라넷엔 몹시 낯선 퇴사발령, 내 이름이 있었다.

2달 반을 기분 좋게 놀았다. 여행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 아무 일없이 평일 대낮의 홍대 거리를 걷기도 했다.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어서 와이프 식사도 챙겨줘 보고 잊었던 친구들을 찾아가서 나 회사 짤렸다고 헤헤거리기도 하고,
하루종일 음악을 듣기도 했다. 기타를 치고, 잊었던 책들을 꺼내서 먼지를 털기도 했고,
그래, 무엇보다도, 시집을 사들였다. 봄이 오던 그때, 막 찾아와 요란한 햇살을 베란다 창문에 끼얹고 있을 때,
거기 기대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시집을 읽고, 한껏 게으름을 부리고,

4월에 이력서를 썼는데 한번에 취직이 되었다. 전 회사보다는 규모가 많이 작은 회사.
하지만 직무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혹은 나의 경력개발에 많이 유리할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참 좋았다. 새로 온 낯선 사람인데도, 모두들 따뜻하게 대해줬다. 5월이 다 가기도 전에 모두 친해졌다.
그리고 나는 참 신나게 일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이 즐거웠다.

여름이 왔고 나를 해고했던 회사의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한번
두번
세번
나는 제갈공명이 아니고 당신도 유비가 아닌데, 사장님은 전화를 해왔다.

가을에 나는 우습게도, 나를 해고했던 회사에 스카웃이 되었다. 해괴한 일이다.
재입사 하자 마자 나는 나의 퇴사 발령 이후 발생한 발령지들을 모두 검색해보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퇴사 발령들. 그 퇴사 발령 한 줄 한 줄 마다 떠오르는 얼굴, 함께했던 기억들.
나의 퇴사 발령이 신호탄이 되어 줄줄이 발생한 대규모 퇴사 발령들.

한바탕 폭격이 있었던 고향의 폐허에 올라앉아 있는 기분이다.
분명 다들 어딘가에서 더 좋은 곳에서 일하고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고향의 폐허에는 묘비가 그득한 기분이 든다.
회사는 고요하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나는, 입사 후 한달 간 백지 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있는 중이다. 상처를 꿰매고 소독약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 전략들이 성공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돌아온 정체모를 죄책감을 스스로 씻고 있는 중이다.

내부 직원들에게 자주 노출되는 직무이다 보니 전국의 사업장과 계열사에서 내 소식을 듣고 전화가 온다.
가끔은 이름만 기억나고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축하한다고, 잘 되었다고, 고생했다고,
잘 된건지, 고생한건지, 축하받을 만한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날씨가 추워진다. 2009년의 끄트머리에 어쩌면 나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지극히 보편적인 삶을 약간은 획득한게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 보통의 인생을,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보자고 했던 그 말들이 이제서야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살아봐야겠지만, 이번엔 좀 많이 배운 것 같다. 인생의 한 수를.

그리고 이런 걸, 느꼈지.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고영민, "공손한 손", 창비, 23p

by djccuri | 2009/11/03 22:28 | 詩를 읽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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